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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경제

오래된 의자의 두 번째 속삭임

by 야무진 수성댁 2025. 9. 29.

얼마 전 주말 오후였어요. 베란다 구석에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쓴 채 놓여 있던 작은 나무 의자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이걸 어디다 쓴담." 의자를 버리기로 . 하지만 의자를 들어 올리는 순간, 손끝에 닿는 나무의 부드러운 감촉과 등받이에 새겨진 작은 꽃무늬 조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의자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를 기억해 줘요'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사 올 때부터 있었으니 저희 집에 온 지도 꽤 됐네요. 화분 받침으로 쓰다가, 잠시 짐을 올려두는 용도로 쓰다가, 이제는 그냥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죠. 자세히 보니 다리 한쪽이 살짝 삐걱거리고, 윗면에는 누가 뜨거운 컵이라도 올려놨는지 동그란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었어요.

결심했습니다. 의자를 고쳐보기로요. 거실 한가운데 신문지를 넓게 깔고 의자를 옮겨왔습니다. 인터넷으로 낡은 가구를 손질하는 법을 찾아보고, 필요한 도구들을 하나씩 사 모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렀지만, 왠지 모를 설렘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습니다.

순간 버릴까, 하는 생각이 스치더라고요. 요즘엔 저렴하고 예쁜 의자도 많잖아요. 그런데 막상 버리려고 하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가장 먼저 겹겹이 쌓인 시간의 먼지를 닦아냅니다.그리고 사포질을 시작했습니다. 슥삭슥삭, 팔이 아파올 때까지 낡은 칠을 벗겨내자 감춰져 있던 나무의 고운 결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치 의자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처럼 보였습니다.

처음 이 집에 이사 와서 짐 정리하다가 힘들어서 털썩 주저앉았던 것도 이 의자였고, 베란다에서 커피 마실 때마다 늘 옆에 있었거든요. 손때 묻은 물건이라는 게 그런 것 같아요. 그냥 물건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이 함께 쌓여 있는 거죠.

삐걱거리던 다리 이음새를 조심스럽게 분리하고, 낡은 못을 빼냈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닦아낸 자리에 새로운 접착제를 바르고 단단히 고정시켰습니다. 의자의 뼈대를 다시 맞추는 일은 마치 누군가의 아픈 마음을 조심스럽게 보듬어주는 과정과도 같았습니다.

그걸 보고 있으니 문득 제가 하는 일이랑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주로 다루는 게 화려한 새 아파트보다는 오래된 빌라나 주택이거든요. 어떤 분들은 낡았다고, 유행이 지났다고 고개부터 저으세요. 하지만 저는 그런 집들을 둘러볼 때마다 숨은 가치를 찾아내려고 애를 써요. 구조가 튼튼하다거나, 햇살이 남향으로 깊숙이 들어온다거나, 요즘 아파트에선 보기 힘든 넓은 베란다가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이 낡은 의자도 어쩌면 그런 집 같은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마지막으로, 나무의 속살에 오일을 바르는 시간이었습니다. 부드러운 천에 오일을 묻혀 문지르자, 건조했던 나무가 깊고 따뜻한 색으로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결국 팔을 걷어붙였어요. 먼저 젖은 걸레로 먼지부터 깨끗하게 닦아냈죠. 그리고 창고에 넣어뒀던 사포를 꺼내 들었어요. 처음에는 좀 거친 사포로, 그다음엔 부드러운 사포로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어요. 서걱서걱 소리를 내면서 나무 표면이 갈려나가는데, 꼭 묵은 때를 벗겨내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하얀 얼룩도, 자잘한 흠집도 점점 옅어지면서 나무의 맨살이 드러났어요.

드디어 의자가 완성되었습니다. 완벽하게 새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희미한 흠집과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었죠.

한참을 문지르고 나서 고운 가루를 싹 털어내고요, 마른 헝겊에 나무에 쓰는 오일을 조금 묻혀서 골고루 발라줬어요. 정말 신기한 게, 메말랐던 나무가 오일을 쭉 빨아들이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마치 목마른 사람이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처럼요. 그렇게 오일을 먹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깊고 은은한 색깔이 살아나면서 나뭇결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요. 삐걱거리던 다리도 나사를 다시 꽉 조여주니 제법 튼튼해졌고요.

그 의자를 창가, 햇살이 가장 잘 드는 곳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처음으로 차를 마셨습니다. 단단하고 편안한 의자는 그녀를 기분 좋게 받쳐주었습니다. 창밖의 바쁜 도시 풍경이 전과 다르게 조금은 여유롭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재미에 한번 빠지니까 다른 물건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서랍 구석에 있던 낡은 가죽 지갑도 꺼내서 가죽 전용 클리너로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영양 크림을 발라줬어요. 그랬더니 푸석하던 가죽에 윤기가 돌면서 한결 부드러워지더라고요. 녹이 살짝 슨 공구들도 기름칠해서 닦아주니 다시 제 기능을 찾았고요.

의자를 고치는 데 들인 시간과 정성은 단순히 물건을 수리하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잊고 있던 소중함을 발견하고, 기다림의 가치를 배우며,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되살려내는 기쁨을 알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새것을 사는 기쁨과는 좀 다른 종류의 뿌듯함이 있어요. 버려질 뻔한 물건에 내 손길이 더해져서 새로운 쓰임새를 갖게 되는 거잖아요. 마치 오래된 집에 사는 분이 자기 취향에 맞게 조금씩 고쳐가면서 정을 붙이는 것처럼요. 물건을 쉽게 사고 버리는 세상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조금 느리게, 조금 더 정성을 들이는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져요.

의자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두 번째 속삭임을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괜찮아, 조금은 천천히 가도 좋다고.

혹시 이웃님들 댁에도 그런 물건이 있나요? 차마 버리지 못하고 구석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손때 묻은 물건이요. 어쩌면 작은 관심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물건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 주는 나만의 방법이 있으시면 저에게도 살짝 알려주세요. 오늘도 편안한 저녁 보내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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